조선의 모파상, 이태준 소설가이자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이태준은 소설의 완성도가 매우 높아 조선의 모파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실력이 뛰어났다.
이태준의 지인인 정지용은 실제 『지용문장독본』 서문을 이렇게 남기고 있다.
남들은 시인 시인 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이 좋지 않았다.
농토(1948) 中 위 문장은 정지용이 극찬했던 이태준의 그 문장이라 하기에 부적당하다.
실제로 서정범은 이태준의 이런 문장이 토지개혁을 주제로 글을 쓰라는 당의 지시에 따라 쓴 것이며 수 차례의 검열을 통해 이태준의 문장과 상당부분 달라졌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과연 한국전쟁 후 이태준의 문장이 달라진 까닭이 무엇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추적할 방법이 없으나, 그의 이런 문장은 이태준이 주장한 일물일어설에 부합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본 고에서 주목하는 이태준의 문장을 앞서 제시한 이유로 분단 이전까지로 한정 지어 봤을 때 이태준의 문장은 서정성이 넉넉하며 예술작품으로서 높은 가치를 가졌다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尙虛 李泰俊 (1909.11.04 ~ 1970.?)
1909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이창하와 안씨 사이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 본명은 규태(奎泰), 호는 상허(尙虛), 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1909년 개화파였던 아버지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이주. 같은 해 아버지 죽음 후 함북 배기미에 정착.
1912년 어머니 죽음으로 철원 귀향. 이후 친척집 전전 1915년 오촌집 입양. 사립봉명학교 입학 1918년 3월 사립보명학교 졸업.
철원 읍내 간이농업학교 입학 후 가출. 여러 곳을 전전하다 외조모가 찾아 보살핌.
이후 서울로 정착 192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스승으로 가람 이병기, 같은 반에 정지용, 김영랑, 박종화 등이 있었음
1924년 휘문고등학교 학계부장으로 활동, 6월 동맹휴교 주모자로 4학년 1학기 퇴학, 친구 김연만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감. 1925년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 1926년 4월 동경 상지대학 예과에 입학. 궁핍한 생활 속 나도향 등과 친교 1927년 상지대학 중퇴 후 귀국. 취업난 겪음 1929년 ‘개벽’에 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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