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체가 바라보는 ‘삶’이란 곧 가치의 척도이자, 철학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그는 삶에 대한 의지에서부터 철학을 시작했다.
삶을 다지는 선은 모든 것의 척도이고, 삶을 약화시키는 것으로의 악은 당연하게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긍정의 철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적용이나 자아 강화가 아니라, 단지 헤아릴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에 관해서 그 자체로 드러내주는 것이 정신분석적 목표여야 한다는 결론까지 도달한다.
물론 프로이트는 거기까지 언급하진 않고 타나토스와 에로스라는 두 개로 본인 연구의 마지막 문을 닫았으며 그것이 이후 현대 정신분석 이론의 커다란 쟁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점은 프로이트 이후 멜라니 클라인이나 안나 프로이트, 라캉과 같은 많은 정신분석자들 사이에서 논쟁으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서양의 합리주의는 존재의 본질을 이성이라고 여긴다.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을 읽고
니체가 바라보는 ‘삶’이란 곧 가치의 척도이자, 철학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그는 삶에 대한 의지에서부터 철학을 시작했다. 삶을 다지는 선은 모든 것의 척도이고, 삶을 약화시키는 것으로의 악은 당연하게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삶의 근간을 약하게 만드는 모든 가치들은 폐기 처분되어야 하며, 반대로 삶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삶의 강화와 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것이 곧 니체의 과제라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어떤 주장이나 믿음이 참[좋음]인지 거짓[나쁨]인지, 또는 그것이 올바른 인식을 근거로 하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대신에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 주장이나 믿음이 삶을 강화시키고 촉진시키는지, 그렇지 않은지다.
따라서 그에게 기독교적 도덕의 선과 악, 차안과 피안이라는 이분법적인 가치 체계와 유한한 인간의 소산물에 지나지 않은 이성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것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가치 체계는 우리의 삶을 강화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여태까지의 오용된 형이상학적 가치 체계를 붕괴하고 새로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가치관을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긍정의 철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적용이나 자아 강화가 아니라, 단지 헤아릴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에 관해서 그 자체로 드러내주는 것이 정신분석적 목표여야 한다는 결론까지 도달한다. 물론 프로이트는 거기까지 언급하진 않고 타나토스와 에로스라는 두 개로 본인 연구의 마지막 문을 닫았으며 그것이 이후 현대 정신분석 이론의 커다란 쟁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점은 프로이트 이후 멜라니 클라인이나 안나 프로이트, 라캉과 같은 많은 정신분석자들 사이에서 논쟁으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글의 결론은 결국에는 무의식이 인간의 본질이며,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숨겨진 우리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길은 저항과 의식의 방어를 지나는 지난한 물음과 탐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점에서 정신분석은 진정한 나를 찾는 지적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합리주의는 존재의 본질을 이성이라고 여긴다. 헤겔(F. W. V. Hegel)에 따르면 이성은 모든 자연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와 생명의 실체인 무한한 절대자다. 또한 인간 현실의 존재와 존립의 근거로서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에 반기를 제시한 쉘링(W. J. Schelling)은 세계에서 존재하는 궁극적 근거가 합리주의를 따르지 않는 비합리주의적인 인간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고 반박한다. 쉘링의 입장과 병행하면서 니체는 존재의 본질을 의지로 여기고, 이성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의지는 결핍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의지 일반이거나 의지 자체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결핍의 충족을 보충하기를 원하는 무엇에 대한 의지로서 의욕이라는 대상을 갖는다.
다시 말해 생동하며 투쟁하는 힘의 의지라는 것이다. 의기소침한 국민들의 의지가 무언가 추구하는 바를 찾을 때 엄청난 힘의 충만함이란 결국에는 생동하는, 그리고 충만함의 열정의지로 바뀔 수 있다. 결국 삶을 살아가는 현장에서 우리를 우리로 만들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무슨 인위적인 의지이거나 합리적 이성도 아닌 우리 내부에 있는 열정과 충만, 그리고 힘이 스스로 창일해져서 흘러넘칠 때, 무언가를 지향하는 힘에의 의지라는 것이다.
한편, 니체는 힘과 의지에 대해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가 내린 해석에 반대하는데,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위한 대상을 ‘생에의 맹목적인 의지’, 다시 말해 의지 자체를 삶의 고뇌를 유발하는 근원으로 여겼다. 니체는 이러한 의지를 생 자체를 부정하는 염세적인 태도를 일으킨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세계를 두고 순진한 허구의 세계이며, 그 도덕도 종교도 현실과 거리를 둔다고 보았으며, 그래서 기독교는 건강한 생을 거부하는 허무주의일 뿐만 아니라, 강자에게 가는 약자의 반항이요, 원한이라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신을 두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이론은 인간과 생 모두를 최저의 수준으로 내리고 끄는 것이기에 생의 양양과 생의 본질인 힘에의 의지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도덕을 ‘노예도덕’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의 정열적인 삶의 의지와 적극적인 힘에의 의지를 의미하고 이런 의지를 실현할 적임자로 위버멘쉬를 제시한다.
니체에 의하면 ‘의지’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을 분명하게 내다보고 있지 못한다는 쇼펜하우어의 견해는 맹목적이다. 니체는 가치가 지니는 근원을 신(神)에 두고서 인간의 외부에 주어지는 의무에 따른 복종으로 이루어진 도덕, 다시 말해 생존 의지를 부정하며 금욕주의적 삶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기독교 도덕을 삶의 본능을 부정했다는 관점에서 전통적인 “우리들의 종교, 도덕, 철학은 데카당스, 즉 쇠퇴한 형식들”이라며 언급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주어와 술어 등의 문법은 언제나 술어의 주체 역할을 하는 주어를 요구하며, 그것에 해당하는 것이 없는 경우라면 가주어라도 만든다. 그 정도로 우리의 주어 와 술어 문법 습관은 견고하며, 그러한 습관이 우리에게 술어와 행위의 담지자이자 행위자인 주어와 주체를 상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번개가 번쩍인다'따위의 문법이 실제로 뜻하는 것은 '번쩍임' 외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물론 '힘에의 의지가 작용한다.'라고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번개가 번쩍임으로부터 분리되는 행위자가 실체가 아니듯이, 힘에의 의지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힘에의 의지가 작용한다.'와 같은 표현 역시 의미론적 습관의 산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동시적 상호관계는 곧 A에서 부와 외부의 구분 자제를 말할 수 없게 만든다. 내부와 의복 구분 자체가 형용모순인 것이다.
작물과 반작용, 능동과 수 리는 구분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상으로 먼저 직용을 가하고, 작용에 대응하는 반작용으로서의 운동이라는 것, 순수한 능동적 운동과 수동적 운동이라는 것은 동시적이고 쌍방향적인 상호관계로서의 힘 싸움에서는 불가능 한다.
힘에의 의지의 운동은 이처럼 외적관계 Inter-relation 와 내적 관계를 비롯하여 작용과 반작용, 능동과 수동이 분리되지 못하게 혼융되며 '융합' 되어있는 상당히 독특한 운동이다. 이런 식의 운동을 하기에 특정 힘에의 의지가 작용했다는 것은 곧 그것이 소속된 관계세계 전체가 한 번에 움직였다는 것을 뜻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생기의 운동은 쌍방향적이다. 또, 전통적인 인과율은 시간의 선후관계를 전제로 둔다. 원인이 되는 사라는 결과적 사대보다도 선행한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의 운동은 동시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전통적인 연과론 모델은 힘에서의 의지의 관계적 역동성을 묘사하는 장치로 사용될 수 없다. 기계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18세기까지 이어지던 데카르트적 기계론 프로그램이나 물리화의 역동적 원자주의를 통해 나타난 기계론은 힘에서의 의지의 역동적 운동에 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기가 어렵다. 우선 데카르트가 제시하고 18세기 프랑스에서 펼쳐진 기계론은 힘을 포함시키지 않고 물체의 운동을 연구하는 방식인 운동학이다. 한편 동역학적 설명 모델은 힘을 고려하는 것이고, 그 시작은 뉴턴이다.
그는 지표면을 배경으로 모든 물체에 보편적으로 가해지는 특정 힘(만유인력)을 인정했다. ‘철학원리’에서 데카르트는 물리적 현상을 ‘압력과 '충돌'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운동과 자기보존명제로 치환하고자 한다. 모든 운동은 외적 원인이 그를 변화시킬 때까지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려 하며, 운동은 직선적 형태로 이어지고, 충돌에서 운동의 크기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적 존재 방식은 니체의 '신체나 몸' 개념을 통해서도 확인되며, 니체가 인간의 사회성을 근거로 제시한 '힘 경제적 가치의 측정이나 교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신체적 존재들의 힘과 경제적 관계 맺음은 호불호를 따지거나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인간이 결핍된 존재이기에 연계를 형성한다는 플라톤식의 자연성도 이때는 해당되지 않다.
또한 자유를 담보로 안전을 보장한다는 근대적 계약 이론 역시 적용될 수 없다. 인간은 그들이 지닌 '본성상' 이미 힘과 경제적 가치의 측정과 교환을 시도하는 관계적 존재이며, 나는 '본성상' 이미 공동적 나라고 보는 것이다.
공동적 개인이나 공동적 세계, 바로 이것이 전근대적 패러다임을 완전하게 벗어나고자 하는 니체가 제시한 나와 세계라는 모습이다. 이처럼 처음부터 상호적으로 구조화된 개인과 공동체에 관련된 개념을 제시하기에, 개인과 공동체를 대립관계로 두면서 등장하는 여러 철학적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오늘을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 그 의미의 답을 찾기 위해서, 그 중에서도 니체에게서 찾기 위해서는 먼저 니체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니체는 독일에 있는 작센주 레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여자들만 있는 외갓집에서 자라는 그의 성장 배경상, 여성적이고도 섬세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고교 때부터 본(Bonn)대학의 신학과를 뛰쳐나왔고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구입해서, 꼬박 2주에 걸쳐 읽고 나서는 철학에 빠져든다. 그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그리스의 고전 문화에 몰두했으며, 군대에 근무하다가 말을 타던 도중에 다쳐 곧 제대했고, 스승인 리츨의 추천을 받아서 스물네 살에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고전어 교수로 서게 되었다.
1870년에 전쟁이 발발해 위생병으로 지원했다가, 심한 이질에 걸려서 곧 제대했다. 그리고 나서 건강은 계속해서 나빠지기 시작했다. 1889년 당시 그는 투린에서 갑작스럽게 마비 증세를 나타내 길거리에서 쓰러졌으며, 이에 대해 예나대학병원에서는 진행성 마비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 후 12년에 걸친 오랜 세월을 혼수상태로 고통 받다가 20세기로 바뀌던 1900년, 끝내 세상을 떠났다. 니체는 사망하기 전까지 최고의 역작으로 꼽히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포함해서 '니체 최후의 고백'과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과 '인간적인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 그리고 '선악의 피안'이나 '도덕의 계보', '이 사람을 보라'와 '권력에의 의지' 와 같은 많은 명저를 남겼다.
니체의 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영원회귀 사상이 등장한다. 니체의 공상적인 관념으로 생(生)은 원의 모형을 띠면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며, 피안의 생활에 달하는 것도, 환생(還生)하여 다음 세상에서 새롭게 생활로 스며드는 것도 모두 부정하여, 늘 동일한 것이 되풀이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현실의 삶의 고뇌와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만을 충실하게 생활하는 것에 생의 자유와 구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와 태도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것은 니체의 초인 사상과도 이어진다. 니체가 언급하는 초인은 고독한 존재이며, 영원히 고통 받는 존재이다.
본래의 관념과 우상을 벗어던진 존재이다. 또한 주체자로서 자신과 외롭게 싸우는 존재이기도 하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의 자신과 투쟁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며 삶을 긍정하는 존재이다.
순간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원회귀의 삶을 보다 주체적으로 돌파하고 극복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오늘날을 살아간다는 의미에 대한 니체의 답변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삶’이란 가치의 척도이자, 철학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그는 삶에 대한 의지에서부터 철학을 시작했다. 삶을 강화시키는 선은 결국 모든 것의 척도이며, 삶을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의 악은 당연하게 추방되어야 한다.
결국 삶의 근간을 약하게 만드는 모든 가치들은 폐기 처분되어야 하고, 반면에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강화나 성장을 위해서 새로운 가치를 수립하는 것이 바로 니체의 과제라는 것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을 초월하여 그의 철학 전체의 성격을 다시 규정한다. 니체가 말했던 탈형이상학적 전회나 본질주의와의 결별, 중심주의 모델과 절대주의 모델의 파기, 그리고 다원주의 모델을 통한 일원론 극복 프로그램이나 실체론으로부터 관계론 Relationalismus으로의 전환이 모두 철학의 제 영역에서 생긴 현대적 지각변동의 단초이며 토대가 됐다.
이와 같은 관계론으로의 전환은 니체 철학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물론 니체가 선보인 철학은 수많은 얼굴을 겸비하고 있는 다면체 철학이다.
그렇지만 청년기의 낭만적이고도 염세적인 멜랑콜리를 삭제한 성숙한 니체 철학은 보다 '긍정의 철학'을 대표적 얼굴로 지니고 있다. 인간과 세계에 관한 긍정 가능성 확보를 과제로 삼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은 그러한 과제 수행을 위해 ‘힘에의 의지’와 같은 방법적 원리를 선택한다.
한편 니체는 힘에의 의지에 대해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가 내린 해석에 반대하는데, 쇼펜하우어는 의지 자체를 삶의 고뇌를 유발하는 근원으로 보았다. 니체는 이와 같은 의지를 생을 부정하는 염세적인 태도를 불러온다고 비판한다. 이런 관점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세계를 순진한 허구의 세계이며, 그 도덕도 종교도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으며, 그래서 기독교는 건강한 생을 거부하는 허무주의일 뿐만 아니라, 강자에게 보이는 약자의 반항이요, 원한이라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이론이 모든 생과 인간을 가장 최저의 수준으로 내려 끄는 것이기 때문에 생의 양양과 생의 본질인 힘에의 의지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도덕을 ‘노예도덕’이라고 여겼다. 의지로서의 세계가 공동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듯,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도 힘에의 의지의 하나이다.
그래서 나는 홀로 존립할 수 있을만한 자존적 실체도 원자적 개체도 아니다. 나의 '무엇'과 '어떻게'는 전체와 내가 내리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나의 행위 역시 오로지 나만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관계적 존재 방식은 니체의 '신체 혹은 몸' 개념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니체가 인간의 사회성의 근거로 제시한 '힘 경제적 가치의 측정과 교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신체적 존재들의 힘 경제적 관계 맺음은 호불호 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인간이 결핍 존재이기에 연계를 맺는다는 플라톤식의 자연성도 여기서는 해당되지 않다.
또한 자유를 담보로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근대적 계약 이론도 적용될 수 없다. 인간은 '본성상' 이미 힘 경제적 가치의 측정과 교환을 하는 관계적 존재이고, 나는 '본성상' 이미 공동적 나인 것이다.
결국 니체의 ‘모든 가치들의 전도’는 본래의 가치들에 대한 부정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부정을 위한 부정’으로만 끝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그야말로 ‘긍정’의 사유 체계라고 할 수 있다.
| 개념 | 정의(본문) |
|---|---|
| 인간 | 인간은 그들이 지닌 '본성상' 이미 힘과 경제적 가치의 측정과 교환을 시도하는 관계적 존재이며, 나는 '본성상' 이미 공동적 나라고 보는 것이다. |
| 이것 |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와 태도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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