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왕은 누가, 어떻게 지켰을까요? 경호학개론 과제로 쓴 리포트로, 정조가 만든 친위 군영 장용영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의 왕실 경호제도를 살펴봐요.
홍국영이 물러나고 숙위소가 폐지된 뒤 정예 무관으로 출발한 장용위가 어떻게 가장 큰 중앙 군영으로 성장했는지를 시기 순으로 따라갑니다.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로 문신을 기른 것처럼 무관도 정예화해 개혁정치를 받칠 세력을 만들려 했다는 배경, 도성의 내영과 수원 화성의 외영으로 나뉜 편제, 다른 군영의 병력을 끌어와 노론 세력의 군권을 약화시킨 과정이 정리되어 있어요.
왕이 궁궐에 있을 때와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호위 방식이 어떻게 달랐는지, 도총부와 내병조를 나누어 통솔한 이유, 선전관과 취라치의 역할까지 설명합니다. 경호학, 한국사, 조선 군사제도 과제에 참고하기 좋아요.
왕의 곁을 지킨 정예 군영, 정조의 장용영과 조선 후기 호위
정조 즉위 초인 1779년 (정조9월에 친위 세력으로 숙위대장을 겸직하고 있던 홍국영이 축출되고 숙위소가 혁파된 이후, 1782년 (정조6)에 설치된 금군 조직으로서의 호위 친위병인 장용위가 설치되었고, 신설 당시 무예와 통솔력을 가진 정예의 무관 30명으로 출발한 장용위는 이듬해에 장용청을 더욱 강력한 중앙 군영으로 확대발전시킨 정조의 친위 군영이 바로 장용영 이었다. 2.장용영 설치의 배경 일찍이 즉위 초에 자신을 위해하고 국왕의 정치력을 제약하며, 와해시키려는 척리, 노론백파 세력 등의 그 기회를 엿보는 상황을 경험한 바 있다. 1781년 (정조규장각과 초계 문신제를 통해 친위 세력을 육성한 같은 맥락에서 최상위 무관직인 선전관의 사강의 시사도 초계문신제도처럼 시행케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무관의 질을 높여 정예화 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위해 군사력을 향상하고 또한 자신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근왕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장용위는 처음에 마군과 보군 삼초 정도에 소규모의 병력을 가진 금군조직이었으나 혁신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조의 왕권강화 의지가 갈수록 구체화됨에 따라 좀 더 규모가 큰 중앙 군영인 장용영으로 확대발전하게 되었다. 3. 장용영의 규모와 체계 1793년(정조 장용영은 화성 유수부의 승격과 함께 한성부 도성에 내영을, 도성의 남쪽 외곽인 화성에서는 외영을 두는 장용내외영제로 일대 확대 개편되었다.
장용영은 중앙군영 으로서는 가장 큰 핵심군사력을 이루었다. 장용외영은 현륭원과 행궁을 수호하고 왕을 호위하는 임무를 갖고 있으며 1794 년 (정조 18)에 화성 완공 후 군사적 정치적 비중은 더욱 커졌다.
장용영 내영의 편제는 5사에 각기 5초를 두어 5사5초를 이루었고 장용영 5사 25초는 1787년 (정조 11)에 시작하여 8년 동안에 단계적으로 완성되었다. 장용위는 원래 마, 보병 3초로 구성되었는데, 이후 내외 영제가 확립되면서 2 초를 더해 1사를 이루었다. 그 군사는 훈련도감으로 확보하였고 금위영, 어영청, 군기사에서도 충당하였다.
후사는 장용영 향군의 시초로 주 임무는 호위라기보다는 꿩과 멧돼지 사냥이었다. 1793년 장용영 내외 영제가 확립되면서 내영에는 3군 15초가 생성되었고, 이후 동왕 19년까지 2사 (10개 초)를 더하여 5사 25초제를 마련하였다. 좌 우사는 대부분 한강 이남의 수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배치하였다.
| 시기 | 내용 |
|---|---|
| 1782년 | 정예 무관으로 장용위 설치 |
| 1783년 | 장용청으로 확대 |
| 1787년 이후 | 5사 25초 편제를 단계적으로 갖춤 |
| 1793년 | 내영과 외영의 내외영제 확립 |
장용영은 왕의 호위에서 출발해 정조 시대 군사 전반을 맡으며 왕권 강화에 기여했고, 조선 후기 경호제도가 국가 안보와 결합해 확장된 모습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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