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1- 독일 표현주의의 관점에서 -
  2. 2참고문헌

시베르베르크의 히틀러 감상 자료, 이런 내용을 담았어요

감독 시베르베르크는 독창적인 실험 작가다.

그가 활동할 당시에 그의 영화는 기피됐다.

혼란스럽고 지루하고, 긴 영화로 여겨졌지만 이것은 또한 그가 관습적이거나 상업적인 방식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여기서 히틀러는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위선적 모습을 드러낸다.

극적인 내러티브와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연극적이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영화로 만들었다.

시베르베르크는 미디어가 어떻게 역사를 대중에게 인식시키는지에 관해 깊은 자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독일의 표현주의 기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독일 표현주의는 1919년에서 1933년까지 독일 영화산업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사회의 분위기가 영화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7년 정부는 회사를 세우고 여러 스튜디오들을 합병했다.

그렇게 우파(UFA, Universum-Film AG)라는 회사가 탄생했다.

시베르베르크의 히틀러 감상 본문, 이 대목이 핵심

시베르베르크의 히틀러 감상

- 독일 표현주의의 관점에서 -

감독 시베르베르크는 독창적인 실험 작가다. 그가 활동할 당시에 그의 영화는 기피됐다. 혼란스럽고 지루하고, 긴 영화로 여겨졌지만 이것은 또한 그가 관습적이거나 상업적인 방식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뮌헨에서 문학과 예술사를 전공했고 브레히트에 관한 8mm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60년대엔 TV에서 180여개의 짧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시베르베르크는 역사에 대한 영화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히틀러의 절친한 친구인 리처드 바그너의 며느리에 대한 다큐멘터리 <빈프레드 바그너의 고백 The Con-fessions of Winfred Wager>(1975)처럼 그는 현재의 독일역사를 탐문한다. 1972년부터 1977년 사이에 만든 <루드비히 2세: 순결한 왕을 위한 진혼곡 Ludwig Ⅱ: Requiem for a Virgin King>(1972) <칼 마이 Karl May> (1974) 그리고 가장 유명한 <히틀러, 독일에서 온 영화 Hitler, a Film from Germany> (1977)(혹은 <우리의 히틀러 Our Hitler>) 등 ‘독일 3부작’은 고집스런 그의 영화세계를 보여준다.

<우리의 히틀러>는 7시간9분 길이인데 소설적인 영화이고, 다큐멘터리이면서 한스 슈베르트의 연기와 다양한 편집화면으로 만들어진 수작. 여기서 히틀러는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위선적 모습을 드러낸다. 극적인 내러티브와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연극적이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영화로 만들었다.

시베르베르크는 미디어가 어떻게 역사를 대중에게 인식시키는지에 관해 깊은 자각을 갖고 있었다. 역사는 실제 사실보다 신문 표제어에 의해 더 쉽게 이해된다. 이러한 대중매체의 시대에 진짜 사건은 쉽게 왜곡되고 하찮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시베르베르크가 <우리의 히틀러>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리고 그는 미학은 언제나 도덕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독일의 표현주의 기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독일 표현주의는 1919년에서 1933년까지 독일 영화산업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사회의 분위기가 영화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굴욕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정치적·심리적 암흑기를 겪게 됐다. 바로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전쟁 때문에 동요하는 사회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줬고 더 나아가 재창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은 영화가 가진 위력에 주목해 독일의 모습을 스크린 위에 창조하고자 했다.

표현주의 영화는 불안이나 사랑, 그리고 증오와 같은 근본적인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영상화 하고 있다. 따라서 내부적으로는 최고의 미적 가치를 추구했으며, 외부적으로는 완벽한 스튜디오 세트를 구성하게 되었다. 표현주의 스타일은 극단적이거나 불균형한 조명을 활용했고, 세트를 추상화시켜 재현시켰으며 일상적이지 않은 카메라앵글을 활용했다.

이와 같은 표현주의 요소들이 1930년대 당시의 미국 ‘공포영화 (horror film)’, 그리고 1940-50년대 ‘누아르 영화(필름 누아르, Film noir)’를 만드는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메트로폴리스>와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관계는 SF영화의 원조라는 것이다. 완전히 산업화된 도시와 사이보그들(Cyborgs), 미친 과학자와 계층분할로써의 수직적 주택 분할, 그리고 컴퓨터와 전화설비 등이 내용적으로 SF영화임을 증빙하고 있다.

1917년 정부는 회사를 세우고 여러 스튜디오들을 합병했다. 그렇게 우파(UFA, Universum-Film AG)라는 회사가 탄생했다. 에리히 포머는 우파의 최고 제작자로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 〈마지막 웃음〉(1924), 〈메트로폴리스〉(1927), <푸른 천사>(1930) 등을 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은 영화가 가진 위력에 주목해 당시 독일의 모습을 스크린에 시각화하고자 했다. 독일 표현주의의 황금기는 1919년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부터 시작해 1933년 히틀러가 영화 산업에 개입할 때까지 이어졌다. 표현주의 영화가 가진 뚜렷한 특징들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됐다.

공포, 혐오, 불안, 사랑과 같은 감정에 주목했고, 기존 영화들과 다른 영화적 관습을 이용해 인간 내면의 감각을 묘사했다. 표현주의 영화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로테스크한 미장센을 구현했다: 뒤틀리고 과장된 스튜디오 세트, 무겁고 극적인 그림자, 극단적인 명암법(chiaroscuro), 범상치 않은 공간 배치, 기울어진 카메라 앵글, 역동적이고 주관적 ㅊ인 카메라 시선,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분장과 의상 그리고 양식화된 연기톤. 조명과 극단적인 명암법은 영화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캐릭터의 심리적 상태를 그린다.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무시하고 터무니없는 명암법을 구사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무너진 것을 보여줬다. 독일 감독들은 카메라라는 창문을 통해 마음을 엿보았다.

카메라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주인공의 의식, 감정, 경험을 반영한다. 큰 제스처 등 과장된 연기톤은 연극 연기와 닮았다.

표현주의 영화는 독일의 정신사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언제나 혁명을 꿈꾸고 성찰하면서도 결국에는 내면세계와 예술의 세계에서만 개혁의지를 나타냈던 독일적 이론문화와 엘리트주의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사회사적으로는 개혁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국에는 이론문화에 그치고 만 계몽주의가 그랬으며 보다 강력한 사회적 저항의식을 겸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문화혁명으로만 남게 된 질풍노도의 작가들이 그랬으며, 또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난 독일 낭만주의가 관념론 철학에 귀의하는데 그쳤다는 사실들이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자아와 현실이라는 괴리가 유난히도 독일인에게는 숙명과 같이 다가와 정적인 조화로운 존재보다는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역동적인 생성의 정신, 다시 말해 파우스트적인 정신이 표현주의자들에게도 규정된 것이다.

표현주의 영화스타일은 이후 필름 누아르와 누벨 바그 등 영화미학상 필수적인 사조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또한 공포영화와 심리영화들에서 많이 차용되었다. 독일 표현주의는 영화미학에서 고전적 논쟁점 하나를 전면적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영화가 어떻게 현실을 기록한다는 굴레를 벗고 자율성을 지닌 예술매체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즉 진정 영화다운 영화를 보장하는 영화미학을 정초했다는 점, 거기에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히틀러의 전기자인 이안 케어셔는 말한다.

“히틀러가 독일 민족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한 압제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야말로 독일사회의 결과물이며 감탄을 받은 인물이었던 사실은 왜 그의 그늘이 아직까지 현재에도 드리워지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히틀러와 관련된 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독일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하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와 정치계에 책임을 다하라는 호소이다. 어떤 몰락이든 간에 그것은 반드시 피해야만 한다.

참고문헌

남완석, 김수지(2019). 독일 표현주의 영화 연구 (1)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범위에 대한 비판적 고찰. 영화연구 제 79호. 65-93. 이진모(2012). 민주주의의 몰락과 독재국가의 출현 - 바이마르공화국 몰락과 히틀러 독재 다시 보기. 역사비평 2012년 가을 호(통권 100호). 454-469.

시베르베르크의 히틀러 감상, 항목별로 정리하기

핵심 개념

  • 혼란스럽고 지루하고, 긴 영화로 여겨졌지만 이것은 또한 그가 관습적이거나 상업적인 방식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 바로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전쟁 때문에 동요하는 사회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줬고 더 나아가 재창조했다.

본문 속 수치

  • 60년대엔 TV에서 180여개의 짧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 1972년부터 1977년 사이에 만든 <루드비히 2세: 순결한 왕을 위한 진혼곡 Ludwig Ⅱ: Requiem for a Virgin King>(1972) <칼 마이 Karl May> (1974) 그리고 가장 유명한 <히틀러, 독일에서 온 영화 Hitler, a Film from Germany> (1977)(혹은 <우리의 히틀러 Our Hitler>) 등 ‘독일 3부작’은 고집스런 그의 영화세계를 보여준다.
  • 독일 표현주의는 1919년에서 1933년까지 독일 영화산업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 이와 같은 표현주의 요소들이 1930년대 당시의 미국 ‘공포영화 (horror film)’, 그리고 1940-50년대 ‘누아르 영화(필름 누아르, Film noir)’를 만드는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 1917년 정부는 회사를 세우고 여러 스튜디오들을 합병했다.

- 독일 표현주의의 관점에서 - — 요점

  • 감독 시베르베르크는 독창적인 실험 작가다.
  • 그가 활동할 당시에 그의 영화는 기피됐다.
  • 뮌헨에서 문학과 예술사를 전공했고 브레히트에 관한 8mm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참고문헌

  1. 참고문헌 남완석, 김수지(2019). 독일 표현주의 영화 연구 (1)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범위에 대한 비판적 고찰. 영화연구 제 79호. 65-93.
  2. 이진모(2012). 민주주의의 몰락과 독재국가의 출현 - 바이마르공화국 몰락과 히틀러 독재 다시 보기. 역사비평 2012년 가을 호(통권 100호). 454-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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