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자료는 그리스도는 누구신을 주제로 정리했습니다. 문서에 적힌 순서대로 설명을 담았습니다. 원문에는 “신약성경이 예수라는 인물을 해석할 수 있는 그 나름의 범주들을 제공하며 우리가 이를 우리에게 더 친숙하고 잘 맞는 것으로 대치하면 신약의 사상을 해치는 것이다”,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통적인 전기 개념으로 대치함으로써, 또 불트만주의자들은 예수의 인간적, 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하고 오직 실존적 진리를 통해서만 그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함으로써 잘못을 범한 것이다”,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에게서는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들어오신 것이 사라졌고, 불트만에게서는 이 도입의 중요성이 예수를 통해서라기보다 각각의 신자를 통해서 오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신학자들은 환원주의적 해석학적 범주들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행위의 참된 중요성이 많이 또는 거의 상실되는 것이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모두 종말론적 틀 안에 놓여야 하고 그렇게 경험되어야 한다”, “신적인 것이 예수 안에서 인간적인 것을 사용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책과 그 배후의 악마를 정복하신 것이다”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신을 표시해 가며 읽으니 앞의 설명과 뒤의 정리가 구분돼 보였어요, 표시를 남긴 채로 다시 읽어 정리했습니다, 표시를 남긴 채로 다시 읽어 정리했습니다, 표시를 남긴 채로 다시 읽어 정리했습니다, 표시를 남긴 채로 다시 읽어 정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신을 따로 표시하면서 읽으면 좋을 거예요, 자료가 그 대목을 중심으로 이유를 이어 가기 때문이죠. 저는 앞부분과 그 대목을 한 번에 읽다가 다시 나눠 읽은 적이 있었어요.
신약성경이 예수라는 인물을 해석할 수 있는 그 나름의 범주들을 제공하며 우리가 이를 우리에게 더 친숙하고 잘 맞는 것으로 대치하면 신약의 사상을 해치는 것이다.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통적인 전기 개념으로 대치함으로써, 또 불트만주의자들은 예수의 인간적, 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하고 오직 실존적 진리를 통해서만 그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함으로써 잘못을 범한 것이다.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에게서는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들어오신 것이 사라졌고, 불트만에게서는 이 도입의 중요성이 예수를 통해서라기보다 각각의 신자를 통해서 오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신학자들은 환원주의적 해석학적 범주들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행위의 참된 중요성이 많이 또는 거의 상실되는 것이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모두 종말론적 틀 안에 놓여야 하고 그렇게 경험되어야 한다. 신적인 것이 예수 안에서 인간적인 것을 사용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책과 그 배후의 악마를 정복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성경 말씀에 대한 설교 안에서도 신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을 뚫고 나가시는 것이다. 말씀이 그 효과에서 인간의 웅변 능력을 초월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갈 때에 말씀이 성령에 의해서 인간의 삶에 뿌리박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간성과 의식에 한번 거하시게 되면, 이 복음은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다른 세대에 속했다는 감각과 확신을 준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계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 안에서 산다 해도, 이 세상의 한 부분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험은 이 세대의 구조 안에서 자증하는 다른 세대의 요소를, 그 경험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항상 나그네로 있도록 하는 다른 실재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복음에 대한 바울의 선포 사이의 연속성을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서신서 일반에, 특히 바울의 서신서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의미에 대한 명료하고 정의적인 표현들은 하나님 나라의 언어 하에서 발전된 것과 정합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서신서의 복음과 유리되면, 이는 대개 후대의 성경 외적인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규범의 통제에 좌우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란 탄력성 있는 개념이고, 아마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계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기간 동안, 이 개념을 사용하셨을 지도 모른다.
시사와 함의, 간접적 드러냄의 요소에서 그 의미의 극치에 이르도록 의도된 것이다. 이것이 이해되지 않고 허용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예수계서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개신교 자유주의에서 일어났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에 의해서 주장된 논의에 의하면 사도들, 특히 바울이 희랍 철학의 유혹에 빠져서 예수의 단순한 신앙을 복잡한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위장된 자기에 대한 주장을 가지고서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진정한 추종자들이며, 바울에 의한 왜곡에서 기독교를 건지는 이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에는 상당히 뛰어난 것, 똑똑한 것으로 보였던 이런 사유 방식은 아무리 흥미롭게 보여도 결국은 전혀 오류에 빠진 개념들을 다 모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복음주의 저자들 가운데서 이런 옛 개념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적지 않은 놀라움이다. 물론 이것이 옛날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제는 아주 흔쾌히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고, 바울이 쓴 것도 하나님 나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상당히 많은 경우에 좌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기독교에 대한 논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로 대치되고 성경의 윤리가 하나님 나라의 윤리로 사회적 책임이 하나님 나라의 변혁이 된 것이다. 복음주의 신앙으로 통하는 것이 그 중요한 몇 가지 요점에서는 자유주의의 새로운 돌출일 뿐인 것이다.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 칭호들은 어떤 점에서는 서로 좀 다른 칭호이다.
“말씀” 칭호는 당시 기독교회에서 별로 많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요한적 관용어이고, “아들” 칭호는 서신서에서 널리, 그리고 상당히 공통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적인 지위를 확언하고, 그 한 부분으로 그가 시간 이전에 영원에서 선재하였었음을 확언하는 것이다.
요한이 그의 “말씀”론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은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로 말하는 바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대한 독특한 관계를 묘사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깊은 곳에서 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형체 안에 오신 하나님이시니, 그가 취하신 인간의 형체는 그의 하나님 되심을 숨기면서, 또 그로 하여금 성부께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고난 받는 종” 칭호는 분명히 성경적 기원을 가진 것이며 서신서에 이르면, 예수는 아주 명확하게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중심적인 분으로 선언된다.
아주 명확하게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통치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종에 의해서 시작되고 도입될 수 있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특히 바울 신학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이 칭호는 새로운 언어학적 관용어와 신학적 내용을 생성해낸다.
“인자”란 칭호는 모든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칭호이다. 이는 여러 번 증명되었으나 오직 예수에 의해서만 사용된 다른 이가 그에 대해 사용한 일이 극히 드문 그런 용어이다. 오직 한 번만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 칭호로서 지시한 인물이 누군가를 확신하지 못했을 뿐이다. “인자” 칭호가 신적인 것이라는 것은 이런 말씀들로부터 피할 수 없이 나오는 결론이고 따라서 “인자” 칭호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온전히 계시되고 그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수행된 선재적 메시아에 대한 동의어가 된다.
속사도 시대의 교회의 신학적 작업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정통”을 어떻게 정의하였는가 이다. 만일 “정통”이 그리스도나 우리 신앙의 다른 중요한 문제에 대한 바른 견해를 의미한다면 우리가 이를 두 가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 신학자들이 있다. 한편에는 “정통”은 사도들이 가르친 것이라고 말하는 견해가 있다. 즉 이를 사도적 가르침이나 전승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하여 정통은 믿고 순종되어야만 하는 고정되고 정적이며 영속적이고 불변하는 일단의 진리라는 것이다.
교회가 당면했던 두 번째 문제는 언어와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간성을 설명하려고 하면서 교회는 이미 철학적 함의를 지니고 사용되고 있던 용어들은 사용했었다. 동방과 서방에서 나타나는 다른 멘탈리티는 초대교회의 이단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영지주의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클레멘트와 같은 동방 신학자들에게는 기독교는 참된 영지이고 소위 영지주의자들은 오직 불완전한 지식을 가졌을 뿐이다. 클레멘트가 말하는 요점은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이 이른 데까지는 옳다는 것이다.
문제는 충분히 더 나아가서 신앙을 가지지 못한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충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과 같은 서방 신학자들에게는 영지주의는 그 전제가 잘못되었으므로 잘못된 것이다.
한눈에 보기
| 구분 | 자료에서 확인되는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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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설명 | 신약성경이 예수라는 인물을 해석할 수 있는 그 나름의 범주들을 제공하며 우리가 이를 우리에게 더 친숙하고 잘 맞는 것으로 대치하면 신약의 사상을 해치는 것이다. |
| 자료 설명 |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통적인 전기 개념으로 대치함으로써, 또 불트만주의자들은 예수의 인간적, 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하고 오직 실존적 진리를 통해서만 그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함으로써 잘못을 범한 것이다. |
| 자료 설명 |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에게서는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들어오신 것이 사라졌고, 불트만에게서는 이 도입의 중요성이 예수를 통해서라기보다 각각의 신자를 통해서 오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
| 자료 설명 | 그러므로 이들 신학자들은 환원주의적 해석학적 범주들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행위의 참된 중요성이 많이 또는 거의 상실되는 것이었다. |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통적인 전기 개념으로 대치함으로써, 또 불트만주의자들은 예수의 인간적, 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하고 오직 실존적 진리를 통해서만 그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함으로써 잘못을 범한 것이다.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에게서는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들어오신 것이 사라졌고, 불트만에게서는 이 도입의 중요성이 예수를 통해서라기보다 각각의 신자를 통해서 오는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신학자들은 환원주의적 해석학적 범주들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행위의 참된 중요성이 많이 또는 거의 상실되는 것이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모두 종말론적 틀 안에 놓여야 하고 그렇게 경험되어야 한다.
신적인 것이 예수 안에서 인간적인 것을 사용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책과 그 배후의 악마를 정복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성경 말씀에 대한 설교 안에서도 신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을 뚫고 나가시는 것이다.
말씀이 그 효과에서 인간의 웅변 능력을 초월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갈 때에 말씀이 성령에 의해서 인간의 삶에 뿌리박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간성과 의식에 한번 거하시게 되면, 이 복음은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다른 세대에 속했다는 감각과 확신을 준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계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 안에서 산다 해도, 이 세상의 한 부분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험은 이 세대의 구조 안에서 자증하는 다른 세대의 요소를, 그 경험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항상 나그네로 있도록 하는 다른 실재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복음에 대한 바울의 선포 사이의 연속성을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서신서 일반에, 특히 바울의 서신서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의미에 대한 명료하고 정의적인 표현들은 하나님 나라의 언어 하에서 발전된 것과 정합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서신서의 복음과 유리되면, 이는 대개 후대의 성경 외적인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규범의 통제에 좌우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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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모두 종말론적 틀 안에 놓여야 하고 그렇게 경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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